베를린, 기괴한 파이프의 정체
- 독한 사유 일기/독일 이야기
- 2021. 12. 30. 17:00
베를린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파란색과 분홍색 파이프들이 머리 위로 동맥과 정맥처럼 이리저리 구불거리며 지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묘하게 조화를(혹은 대비를) 이뤄 하나의 설치작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흉물스럽게 보는 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회색 도시에 색의 숨결을 불어넣는 재미 요소라고 생각한다.
정체불명의 파이프들, 도대체 왜 필요한 걸까?
'슈프레(Spree) 강'을 따라 '박물관 섬(Museumsinsel)'이 위치한 '프리드리히슈트라쎄(Friedrichstraße)', '알렉산더 플라츠(Alexander Platz)',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 등 사실상 공사가 진행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이 파이프들이 설치되어있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파이프가 도시 곳곳에 존재하는 걸까?
공사 현장에 있으니 공사에 필요한 용도겠거니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동생이 베를린에 여행 왔었을 때 내게 파이프의 용도에 관해서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도대체 어디서 들은 정보인지 모르겠지만). 동서독이 나뉘었던 시절, 동독이 상하수도 관을 지하에 묻을 돈이 부족해 공중에 설치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파이프들이 슈프레 강 근처에 유독 많았기 때문에, 틀린 정보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왜 유독 공사 중인 곳에 유난히 많을까? 또, 왜 다른 색으로 파이프를 구분했어야 했을까? 인터넷을 아무리 헤집고 다녀도 동생이 알려준 것과 같은 정보는 찾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몇몇 독일어 웹사이트에서 공통으로 언급되는 내용을 토대로 사실에는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었다.
파이프 존재 이유, 베를린의 지질이 원인?
베를린의 지질은 '습지(Sumpf)'로 지하수가 지표면에 가깝게 형성되어 있다. 어떤 곳은 지표면에서 지하수의 표면인 '지하수면(Grundwasserspiegel)'까지 고작 2.5m로, 일반적인 독일 건물 지하 창고가 지표면으로부터 2~3m 깊이에 위치한 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인상적인 수치다. 말 그대로 땅을 파면 그 구덩이에 물이 들어차 공사를 하는 데에 문제가 된다. 이런 이유로 파이프를 설치해 슈프레 강이나 주변 수로로 이 지하수를 펌핑하고 흘려보내는 것이다.
파이프의 색이 여러 가지인 이유는 단순하다. 시공 회사들이 그들의 파이프를 구분하기 위해서다. 이런 파이프들은 베를린뿐만 아니라 독일의 다른 도시들, 예를 들면 '쾰른(Köln)', '라이프치히(Leipzig)' 그리고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베를린만의 독특한 풍경은 아닌 것이다.
'지하수면'이 지속해서 상승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9년 이후로 베를린 '지하수면'은 50~100cm가량 상승했는데, 원인은 '물 소비량의 감소'에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거대 회사들이 문을 닫으면서 물 소비량이 크게 줄었는데, 1989년 대비 베를린의 물소비량은 50%나 감소했다.
베를린에서 사진을 찍을 때면 늘 이 파이프에 주목했었다. 공사가 있는 곳에 임시로 설치되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 구조물들을 사진에 녹여 담아내는 것이 흥미로웠다. 어디든 공사가 마무리되면 누군가에겐 흉물이었을지도 모를 이 파이프들은 철거될 것이다. 언젠가 당연히 치워져야 할 존재, 이런 이유로 내게는 어느 설치미술 작품 못지않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독일을 여행할 계획이 있다면, 특히 그중에 베를린이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면, 이 파이프들을 따라 걸어보는 걸 어떨까? 유명한 베를린의 볼거리들과 이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쇳덩어리들의 개성 있는 시각적 조합에서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점점 사라지는 볼거리
2020년 1월에 귀국했으니 베를린을 독일을 떠나 온지도 꽤 되었다. 이 글은 2018년 7월 7일에 게시했던 글을 재편집한 것이다. 글을 새로 게시하기 전에 파이프에 관한 최근 기사를 검색했다. 2020년 기사에 따르면, 베를린의 파이프들이 철거되고 있는 모양이다. 푸르고 붉은색의 조형물이 도시에 생기를 더하는 볼거리라고 생각했었기에 아쉽다. 당장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다시 베를린을 방문했을 때에는 조금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그곳에 살았던 때를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 더 많이 보고 더 자주 담아두지 못한 게 마냥 아쉽다.
이 포스트 작성에 참고한 사이트
"Steigendes Grundwasser - Wo Berlins Keller nass werden", Berliner Morgenpost, 2018년 7월 7일 접속.
"Grundwasser-Anstieg Berlin wird zum Venedig an der Spree", Berliner Zeitung, 2018년 7월 7일 접속.
"Ende einer typisch Berliner Sehenswürdigkeit", Der Tagesspiegel, 2021년 12월 29일 접속.
